청학동이야기


  •  
     
    보이는 청학동 그림이 은밀히 가보고 전해 내려오고, 또 필요에 의해 그려지며 점차 많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제일 오래 되었다고 여겨지는 청하동도는 1700년대에 그려졌다고 추정된다.
    지리산 삼성궁의 한풀선사의 말에 의하면 그간 전해온 청학동도는 100장으로, 요 근래에도 한 두 장 더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 후에도 청학을 찾아 지리산을 헤맨 사람들이 몇 몇 있었으나 청학은 외적이 나타날 때마다 자취를 감춘다는 속설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청학의 생김새를 중국의 문헌 습유기에서 살펴보면 사람 얼굴에 새의 부리를 하였으며 날개가 여덟 개요, 발이 하나라고 하였다. 또 날개 빛이 푸르다고 청학이 아니며 오히려 꿩 빛깔인데 이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해 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선교에서는 선인이 하강할 때 타고 내리는 교통 수단으로 이 환상의 새를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청학동이란 청학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난리에 시달린 피난민들이 이 동처에 살면서 천하가 태형하여 진다는 청학의 울름소리를 선망하여 붙여진 이름이거나 도교의 영향을 받아 이 동천을 선경으로 보고 선인이 타고내린 청학으로 동천의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어느날 남추가 편지 한장을 써서 종에게 주며

    하고 일렀다.
    종이 주인의 말대로 청학동을 찾아가니 과연 그곳에 한 노인이 노승과 더불어 대국을 하고 있어 그노인에게 편지를 올렸다.
    노인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느니라" 하고 웃으면서 말한 다음에 답서를 쓰더니 푸른 구슬로 된 바둑을 하나를 답서와 함께 종에게 주었다.
    그런데, 남추가 죽은 후에 그 바둑알도 없어지고 말았으니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청학동의 그 노인을 고운 최치원이라고 하고 노승을 금원선사라고 하였다.
       
     
    옛 노인이 서로 일러 전하기를 그 사이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통행하되 기어서 겨우 몇리를 가게되면 탁 트인 지경(地境)을 얻게 된다.
    사방이 다 좋은 전지와 기름진 땅으로서 씨뿌리고 심을 만하며 푸른 학이 이 가운데 깃들어 살므로 청학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니 이는 옛날 속세를 등진 사람이 설던 곳이므로 허물어진 담과 구덩이를 가시덤불속에 싸인 빈 터에 남아있다고 하였다.
    얼마전에 내가 당형(堂兄) 최 상국(崔相國)과 함께 숨어살 뜻이 있어 서로 이골짜기를 찾기를 약속하고 죽롱(竹籠)에 송아지 두세 마리를 담아 그곳에 들어가 속세와의 연락을 끊으려 하였다.
    마침내 화엄사로부터 개화현에 이르러 무득 신흥사에서 잤더니 지나는 곳마다 신선의 경지 아닌 곳이 없었다.
    천(千)의 바위는 다투어 빼어나고 만(萬)의 구름은 흐르는데 대(竹) 울타리와 띳집이 복숭아꽃 살구꽃에 어른거리어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학동은 마침내 찾지 못하고 시를 바위에 새겨 두었다.
    어제 우연히 서재에서 오류선생(五柳- 晋國 陶淵明의 自號) 문집을 보다가 도화원기가 있어 읽으니 대개 난리를 피한 진(秦)나라 사람이 처자를 거느리고 그윽하고 험한 지경에 산이 둘러있고 시내가 거듭 흘러 나무꾼도 가지 못할 만한 곳을 찾아 살았는데 그 뒤 진(晋)나라 태원(太元) 연간에 고기잡이 하는 사람이 요행히 한번 이르렀으나 그만 그 길을 잊어 버려 다시는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후세에 단청(丹靑)으로 그림을 그리고 노래지어 이것을 전하였으므로 도원(挑源)을 신선의 세계로서 우기와 표륜으로 길이 살고 오래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곳이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이것은 무릇 도원기를 미숙하게 읽은 까닭이니 실로 청학동과 다를 것이 없다.
    어쩌면 고상한 선비 유 자기(劉子驥)같은 사람을 얻어 한번 가서 찾아볼까 한다.